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리랑카 내전 (문단 편집) == [[인도]]의 개입 == 한편 이런 스리랑카의 종족 분쟁 상황은 스리랑카의 인접국이었던 [[인도]]에게도 큰 파급력을 일으켰다. 사실 인도 역시 인도 남부 지역에 1억 명 가까이 되는 타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인도의 타밀족들은 북인도 중심의 중앙정부의 [[힌디어]] 공용어화 정책에 맞서 정부의 힌디어 공용어 정책을 무산시키고 타밀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고 북인도 중심의 인도 정부의 정책에 매번 반기를 드는 등 인도의 타밀족 역시 북부 인도에 대한 정서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스리랑카의 내전 상황을 방치하여 스리랑카의 타밀족들이 독자적인 타밀족 독립 국가를 수립하거나 싱할라족이 지배하는 현 스리랑카 정부를 전복시킬 경우 그 영향력이 인도 타밀족에게 미쳐 분리 독립 운동을 고무시키고 나아가 다른 인도 내 종족들과 타 지역들에게까지 영향력이 닿아 인도의 국가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리랑카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인도의 간접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의 내전 상황은 더욱 격렬해졌고, 결국 내전이 장기전 태세로까지 번지자 인도 정부 내부에서도 내전 중인 스리랑카에 군대를 [[파병]]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1987년 스리랑카 리처드 자야와르데네 대통령과 인도 라지브 간디 총리 등 스리랑카와 인도 양국 정상은 내전이 진행 중인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들의 [[인도군]] 주둔과 LTTE의 무장 해제,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을 골자로 하는 인도-스리랑카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동년 평화유지군 형태의 인도군 조직인 '인도 평화유지군(IPKF)'이 결성되었고 이들 IPKF는 인도-스리랑카 협정의 내용대로 LTTE의 무장해제와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 달성을 목표로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에 파병, 주둔하면서 인도는 스리랑카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스리랑카에게 IPKF 인도군을 주둔시키는 대가로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에 주둔중인 스리랑카군 완전철수와 주둔권, 지역 치안권, 평시 교전권과 [[전시작전통제권]]을 인도 측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는 그런 권리를 인도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반발하였으나 인도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비상시 교전권과 전작권 등을 제외한 채 모든 권리들을 사실상 인도 측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파일:external/thuppahi.files.wordpress.com/f6-ipkf-troops-on-guard.jpg|width=874]] ▲ LTTE 반군을 상대로 교전을 벌이는 IPKF 인도군 그러나 스리랑카 정부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LTTE는 급기야 IPKF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스리랑카 내전은 IPKF와 LTTE 반군간의 전쟁으로 번졌다. 이에 IPKF는 [[공격헬기]]와 [[전차]] 등을 동원해 LTTE 반군들을 진압하려는 여러 진압 작전들을 펼치기 시작했고 LTTE는 IPKF에게 열세로 밀리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www.sangam.org/NewsweekNov91987sarongclad.jpg]] ▲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전선을 둘러보는 LTTE 반군 대원. 그러나 이러한 IPKF의 진압 작전에도 불구하고 LTTE는 좀처럼 저항을 멈추려 들지 않았고 결국 이런 인도군의 스리랑카 내전의 군사적 개입은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은커녕 타밀족과 싱할라족간의 민족 분쟁만 더욱 악화시켜 버렸다. 더욱이 스리랑카에 주둔 중이었던 IPKF 병사들은 '''현지 주민들과 민간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과 인권 유린, 약탈, 학살 등 반인륜 범죄를 일삼으면서''' 결국 IPKF는 그나마 남아 있었던 현지주민들 사이에서도 __인도 평화살해군, 민간인 학살군__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더욱이 스리랑카 현지 상황에 대해 잘 모르던 스리랑카 파견 인도군 장성들의 행태와 개입 초 스리랑카로부터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의 군대 주둔권과 전작권 등을 사실상 빼앗아 독점한 인도의 개입은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주둔권을 제외한 교전권과 전작권 등을 스리랑카에게 돌려준 뒤 [[스리랑카군]]까지 끌어들여 스리랑카군과 합동으로 LTTE 반군 진압을 시도했지만 LTTE를 굴복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더욱이 끊이지 않는 LTTE의 공격으로 IPKF 역시 사상자들을 여럿 냈다. [[파일:attachment/스리랑카 내전/1e.jpg]] ▲ 스리랑카에서 철군하는 인도군. 결국 1990년 3월 라지브 간디 총리의 뒤를 이어 인도 총리가 된 비슈와나트 싱 인도 총리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스리랑카에 주둔하던 인도군 병력을 철수시켰다.[* 비슈와나트 싱은 전임 총리이던 라지브 간디와 비슷하게 스리랑카 내전 개입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으나 내전에 파병된 인도군의 피해가 커지면서 인도판 [[베트남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만들 거냐는 인도 내의 반전 여론에 부딪혀 철군을 단행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4면이 바다에 고립된 작은 섬나라였기에 인도가 마음만 먹고 스리랑카 주둔 인도군의 병력을 더욱 증파했거나 LTTE에 대한 무차별적인 진압 작전을 강행했다면 분명히 인도가 승리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파키스탄, 이란 등 물자보급, 도주를 할 수 있는 육로가 존재했다.] 결국 1천 명에 달하는 전사자 및 2,25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낸 채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인도가 스리랑카 내전에 무력 개입을 중지하자 목적을 잃어버린 IPKF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인도군을 파병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LTTE는 1991년 [[라지브 간디]] 전 인도 총리를 자폭 테러로 [[암살]]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